본문 바로가기
세계

흑사병은...

by 희황 2020. 4. 15.

중세를 휩쓴 흑사병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끔찍한 전염병 사태였습니다.

최악의 전염병이라는 악명에 걸맞게

그 치사율 또한 엄청났는데.

증상에 따라 치사율이

60%에서 100%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흑사병이 흽쓴 마을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쏟아지곤 했는데요.

흑사병은 3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유럽 인구 1/3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소멸할 듯하다가도 또다시 유행을 반복하며

무려 30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역병의 창궐이

그저 오랜 역사 속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지금.

그 시대 사람들이 겪었던 전염병 사태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흑사병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걸까요?

원인과 전파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요.

몽골군의 침략으로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1346년

유럽 원정을 떠난 몽골군대는

흑해의 북쪽 해변에 위치한 도시

카파를 점령하기 위해 공성전을 치렀는데요.

몽골군 사이에서 갑자기 흑사병이 퍼져

많은 병사가 죽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몽골 제국 킵차크칸국의 10대 칸이었던

자니베크칸은

살아남은살아 남은 군대와 함께 철수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감염된 시체를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 안으로 던지라고 지시했습니다.

아직 세균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도 않았던 시기에

일종의 세균전을 시작한 셈이었죠

당시 카피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식민 도시였는데

제노바인들의 무역항로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카파에 역병이 돈다는 소문이 퍼지자

상인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배에

황급히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탈리아에 전염병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 퍼진 전염병은 내륙으로 확장되었고

유럽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심지어 러시아에까지 퍼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연구에 의하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흑사병이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합니다.

그 발원지는 중앙아시아로

교역로와 해운 망을 따라

서방으로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발원지가 중국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참고로 흑사병은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전 세기에 걸쳐 대유행이 일어났는데요.

유럽 역사 중심으로 보면

대표적으로 총 3차례의 대유행이 있었습니다.

1차는 6세기경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황제시대 때

2차는 14세기의 중세 유럽 때

그리고 3차는

1855년 중국의 윈난성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중에서 2차 페스트 대유행이 일어난

14세기 중세 유럽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놀라운 것은 최근 해외 연구 결과에 따르면

3차례의 대규모 유행사태를 일으킨 페스트균들이

모두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흑사병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문제는 지금까지도 여러 학설 들이 이어지는데요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인체먼역결핍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라는 연구도 있고

에볼라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페스트균( Yersinia pestis)’이 그 원인이라는 분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흑사병은 페스트균에 감염된 설치류에 기생하던 벼룩이

설치류의 피를 빨 고난 후 사람을 물 경우 전염됩니다.

위생 환경이 좋은 요즘은

가정집에서 쥐나 벼룩을 거의 볼 수 없죠

그런데 중세에서 쥐는

얼마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14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는 무척 더러웠는데요.

중세 시대 사람들은

의외로 도시 위생에 관심도 많았고,

거리를 청결하게 하려는 여러 시도를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와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더럽고 냄새가 나는 편이었습니다.

중세 도시의 거리는 가축의 똥이나

도축을 할 때 발생하는 피

그리고 사람들이 버린 온갖 오물이 넘쳤고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리고 곡식 창고를 1층에 두고

생활 공간을 2층에 두는 주택 양식 때문에

쥐들이 드글거리기 좋은 구조였다고 합니다.

감염된 벼룩에 노출되어 피를 빨린 쥐들은

흑사병에 걸려 죽었는데요.

쥐가 죽으면 벼룩은 다음 숙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쥐와 가까이 생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흑사병에 걸리면 초기에는 발열과 두통

온몸이 욱신거리는 몸살 증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목이나 겨드랑이, 허벅지,

목 주변같이

림프절이 위치한 부위가 부어올랐다고 합니다.

이를 림프절 페스트라고 부르며

페스트 증상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아프고 쓰라린 통증과 함께

빨갛고 맨들맨들하게 부어오른 살은

마치 불에 데였을 때처럼 수포가 생겼는데요.

이때 생긴 종기에 고름이 차올랐습니다.

그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달걀에서 사과만 한 크기로 커졌다고 합니다.

몸 곳곳에 퍼진 종기 주변은 피부밑으로 피가 고여

검붉은 빛으로 변하기도 했는데요.

종기가 터지면 피나 고름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고열이 지속된 환자들은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가 되었고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증상이 나타난 환자들은 대부분

이틀에서 사흘 뒤면 사망했습니다.

흑사병 환자들이 겪은 고통은 엄청났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아팠는지.

고통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동네를 뛰어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최악의 사례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폐페스트였습니다.

폐페스트는 환자가 내뿜은 기침을 통해 감염되는데요.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직접 전파가 가능하며

전염속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폐페스트는 생명에 가장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림프절 페스트의 사망률이 50% 정도인 데 비해

폐페스트는 거의 100%에 이르렀죠.

폐페스트에 걸리면 처음에는 심한 두통과 피로,

전신이 무력해지는 증상이 나타나며

호흡이 빨라지고, 숨을 쉬기 힘들어지거나,

기침, 가래, 가슴 통증 등

호흡기 증상이 발생했습니다.

각혈에 의한 과다 출혈로

기도가 막혀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감염된 사람 중에는

하루 만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림프샘 페스트나 폐페스트가 절절히 치료되지 않을 경우

패혈증 페스트로 진행되었습니다.

패혈증 페스트에 걸리면 피부 괴사가 일어났는데

손이나 발이 썩어서 까맣게 변했습니다.

이처럼 피부에 나타나는 검은 증상들 때문에

흑사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하지만 흑사병이라는 말 자체는

14세기 중반에는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엔 흑사병을 그저

역병 또는 대몰살 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페스트를 지칭하던 라틴어인

pestis atra

또는 atra mors를 영어로 직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일어났고

이때 흑사병이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14세기 '아트라'는 '검은'이라는 의미였고

이와 함께 '지독한, '무서운'이라는 의미를 함축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세 사람들은 흑사병을 어떻게 고쳤을까요?

안타깝게도 당시의 의학적 지식은

오래전에 발전이 멈춰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해부학 지식은 조악한 수준이었고

인체 기관의 기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전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기원전 5세기 때의

천년 묵은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었는데요.

그리스 의사인 히포크라테스가 처음 기초를 세우고

기원후 2세기 히포크라테스의 추종자인

로마인 갈레노스가 체계화한

체액 이론이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체액 이론은 몸을 구성하는 액체가 균형이 맞지 않으면

질병이 생긴다는 것인데요.

치료로 쓰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방혈법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동맥을 절개해 몸속의 피를 빼내곤 했는데

이를 통해 몸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방법은

역병에 맞서기엔 너무나 무모한 방법이었습니다.

방혈 외에도 종기를 째고 뜸을 들이기도 했는데요.

독을 빼내기 위해 종기에 송진과 흰 백합 뿌리,

건조한 인분으로 만든 고약을 붙였습니다.

상처 부위에 후추를 뿌리거나

털을 제거한 닭 엉덩잇살을 문지르기도 했습니다.

치료에는 다양한 약이 처방되었는데.

사과 시럽과 레몬, 장미 수,

페퍼민트 혼합물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흑사병 시기 최고의 해독제로 권장된 약은

테리아카였다고 합니다.

테리아카는 여러 약제를 벌꿀에 개어 만든

해독제였는데요.

반드시 1년 정도 숙성을 해야 했습니다.

의사들은 아침 공복에 일주일에 두세 차례 정도

이 테리아카를 먹도록 권장했다고 하는데요.

테리아카라는 이름이 곧 해독제를 의미하는 용어가 될 정도로

명성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의사들은 에메랄드와 진주,

금이 역병에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메랄드 등의 보석을 갈아먹거나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해독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죠

금과 수은

약초 등을 넣어 끓인

해독제를 마시도록 처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은

이 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죽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살아남길 원한 사람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나쁜 공기가 전염병을 유발한다고 믿어

신선한 허브를 입에 갖다 대기도 했죠.

커다란 까마귀 부리를 쓴 이 기괴한 복장은

흑사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입었던 복장인데요.

17세기에 등장한 복장이라고 합니다.

부리처럼 커다란 마스크 안에는

향기가 강한 허브를 담았다고 하는데요.

허브의 냄새가 흑사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준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검은 고양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잡아 죽이기도 했는데요.

자연적으로 쥐의 수를 조절해줬을지도 모르는

개와 고양이를 죽인 셈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6세는

파리 대학의 의대 교수들을 초빙해

문제 해결 방법을 물었는데요.

프랑스 파리 대학교의 의학부는

흑사병이 천체 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토성과 목성, 그리고 화성이 물병자리 궁에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행성들의 위치가 만들어낸 문제가

대기의 기장에 손상을 입혀

흑사병이 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염병 문제가 별자리 탓이라는 이런 분석이

지금은 무척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중세시대는

점성술이 최고 전성기에 이르렀던 시기였습니다.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며 점을 치고

별자리를 연구하는 것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학문이었죠.

의사들은 점성술을 의료 상식과 함께 공부할 정도였고

왕진 가방 속에 점성술과 관련된 서적을

함께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중세시대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예방책과

쓸모없는 치료책들이 반복되었는데요.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종교 세력이었던 가톨릭에서는

전염병을 신이 내린 형벌이라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의 일부 극단적인 종파에서는

자신의 몸을 채찍으로 때리는 종교운동이 일어났는데요.

이 집단에 모인 사람들을

채찍고행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요.

공동생활을 하며 마을과 마을 사이를 몰려다녔습니다.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첫째로 광장에서 공개 미사를 올렸는데요.

미사가 끝나면 스스로의 몸

또는 서로의 몸을 피가 날 때까지 채찍질하며

역병을 내린 신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채찍에는 뾰족한 징이 박혀있었는데,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등에 생긴 깊은 상처로 인해

전염병에 더욱 취약한 환경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이때쯤 한 소수 집단이 역병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는데요

그들은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럽에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

역병이 번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터무니 없는 헛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과거부터

유럽인들이 가져왔던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백을 강요받았고,

거짓 자백을 할 때까지 고문당했습니다.

중세유럽에선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무고한 유대인들은 화형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비교적 역병에 잘 걸리지 않았던 것도

역병의 전파자로 의심받은 이유 중 하나였는데요.

이는 유대교의 율법 특성상 손을 자주 씻는 등

위생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동안 고리대금업이라는 수단을 통해

부를 축적해왔었는데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서

상당한 돈을 빌려온 다른 권력층들은

유대인들을 향한 공격을 부추기거나 이끌면서

자신들의 빚을 사실상 청산했습니다.

이시기 350여 건의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났는데요.

중·서부 유럽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뿌리 뽑히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지역으로 대거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습니다.

집집마다 끌어낸 시체를 한곳에 쌓아두면

그 자체로 커다란 무덤이 되었고,

시체를 묻을 곳이 부족해

한 구덩이에 시체를 몰아넣고

켜켜이 겹쳐서 묻곤 했으며,

흙이 제대로 덮이지 않은 시체에는

짐승들이 달려들어 뜯어먹곤 하는

참혹한 광경이 이어졌습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역병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어갔고

살아남은 자들도

자신이 역병을 피해갈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남은 사람들 중에는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이 묻힐 곳을 미리 정해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세를 기록한 사람들의 글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타납니다.

후세의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기록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1347년 창궐한 흑사병은

14세기 중세 유럽을 뒤덮었는데요.

초기 2~3년의 피해가 가장 컸으며,

이때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지역에 따라 그 비율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요.

이 기간 동안

유럽인 세 명 중 한 명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흑사병은 1351년 소멸 기세에 접어드는 듯했지만

이후에도 여러 차례 대 유행이 일어났고.

일부 지역에선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1855년 중국 윈난성에서 유행한 페스트균이

새로운 변종임이 확인되면서

그 이후를

제3차 페스트 범유행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소멸한 이유에는

지구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소빙하기의 영향

또는 영양 상태가 개선된 것,

그리고 철저한 공중보건 정책이 발전한 것,

그리고 흑사병에 내성이 증가한 것 등

여러 요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흑사병의 발병 원인을 밝혀내고

효과적인 치료법이 발전한 건

한참이 지난 19세기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흑사병은 여전히 위험한 걸까요?

최근까지도 여러 국가에서 흑사병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는데요.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실제 전 세계적으로

매년 2,500명 안팎의 흑사병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주로 마다가스카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생하는데요.

WHO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아직도 연평균 400건 정도의

흑사병 감염 사례가 보고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흑사병으로 숨진 사례가 매년 보고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현재 흑사병은

항생물질을 기반으로 치료가 가능하기에

제때 적절한 치료만 받는다면

사망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기 치료를 받지 않으면

수 시간 내에 증상이 급격히 진행되고

사망률이 올라가기 때문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네요.

다행히도 아직 국내에서는

흑사병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오늘 준비한 흑사병 이야기는 여기까지였습니다.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권력 투쟁  (0) 2020.05.01
스페인 독감  (0) 2020.04.15
질병의 역사! 콜레라  (0) 2020.04.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