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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차 세계대전 11

by 희황 2020. 4. 15.

1918 년 5월 27일 서부전선에선

독일의 세 번째 공세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미 초기 두 차례의 공세에서 실패를 거듭한 뒤였지만

독일이 발휘한 저력은 엄청났습니다.

세 번째 공세에서 단 나흘 만에

마른 전선에 도달하는 쾌거를 이뤄냈죠.

마른강 돌출부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는

60마일도 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지원병력을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때 미 제2사단과 제3사단이 전선에 나타나

프랑스군과 나란히 독일군을 막았습니다.

독일군은 결국 지난 공세 때처럼 더는 전진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소모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공세는

커다란 돌출부만을 남긴 채

6월 4일 중단되었습니다.

독일은 좀 더 방어하기 쉬운 지역을 확보하며

더 많은 프랑스군 예비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6월 9일 4차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폰 후티어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이미 병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음에도

공세 첫날 6마일이나 진격하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진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독일은 더는 공세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고

병력 또한 무척 부족했습니다.

6월 11일

프랑스의 샤를 망쟁 대장은

지상 공격기와 전차의 지원을 받아

독일에 무자비한 반격을 가했습니다.

독일의 4차공세는

2일 만에 곧바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공세는 매번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습니다.

공세를 시작하면 초반에는 성과를 이루는 듯했으나

곧 대규모 지원병력이 진군을 막았고

힘이 빠진 독일군은 새로 형성된 전선의 전방에서

힘겨운 소모전을 치르다 공세를 멈췄습니다.

공세를 치를 때마다 병력은 계속해서 줄어들었습니다.

춘계공세에 투입된 병력이 사실상

독일이 보유한 마지막 병력이었기에

독일은 병력 난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리한 공세로 병력과 물자가 소진된 독일군에

또 다른 악몽이 찾아왔습니다.

1918년 6월에 퍼지기 시작한

스페인 독감이었습니다.

향후 2년 동안 전 세계를 뒤덮은 스페인 독감은

1차 대전의 사망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발생한

최악의 전염병이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엄청난 속도로 확산하기 시작했고.

식량 부족으로 면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독일군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독일은 스페인독감으로

6월에만 5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습니다.

연합국도 지난 전투로 수십만 명의 병력을 잃었기에

비슷한 고민을 겪었지만 상황은 달랐습니다.

이때쯤이면 서부전선에

미군이 전폭적으로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프랑스에는 매달 25만 명이 넘는 미군 원정군이 투입되었는데

전투지구와 배후에 25개 정규 사단이 배치되었고

55개 사단이 추가로 조직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더는 승산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나빴습니다.

하지만 루덴도르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다섯 번째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달린 이번 공세에선

기습작전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탈영병과 포로 항공 정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독일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포슈는

독일의 기습 공격에 대비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7월 14일

기습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독일군이 전선에 집결했습니다.

이때 먼저 포격을 개시한 건 연합군이었습니다.

독일은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공세를 목표로 했던 지역에서

겨우 몇마일 밖에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아주 효과적인 방어 전술을 활용했기 때문에

독일은 목표로 했던 지점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도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공세는

아무런 목표도 이루지 못한 실패한 공세였습니다.

결국 공세는 7월 17일 중단되었습니다.

독일의 모든 운을 걸었던 춘계공세는

이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독일엔 더는 남은 패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대표적으로 7월 18일 2차 마른전투가 벌어지고

8월 8일 아미앵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연합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이어가

독일의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의

전방 진지를 함락시켰습니다.

독일은 이때 지난 4개월 동안 확보한

모든 지역을 잃었으며

주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으로 물러났습니다.

이시기 미군은

단독공세를 통해 독일군을 몰아내는 등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독일이 퇴각하는 중이었고

독일이 4년간의 소모적인 교착상태로 사기가 저하됐지만

미군은 전투 피로가 없는 신병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군의 군사 역량을 과대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군은 전쟁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거의 전쟁 후반에 참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군사적으로 효과적이었다기보다

열정적이었다고 평가되곤 합니다.

참고로 1차 대전 때 미군은

급하게 징집되어

어디까지나 덜 숙련된 풋내기 병사였고

경험이 부족해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술적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미군의 등장만으로도

독일이 받은 심리적 중압감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에서

모든 패를 다 써버린 독일과 달리

연합군은 미국의 등장으로

보급품과 병력이 끊임없이 보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독일 병사들 사이에선

더는 승산이 없다는 인식이 퍼졌고

사기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독일군의 사기가 무너진 증거들은

독일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9월초 병력 수송 열차 차에 낙서 된 문구들 중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빌헬름 황제와 그 아들들을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

병사들에겐

더는 독일군 지휘부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을 무섭게 몰아붙이던 연합군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세를 몰아 서부전선에서 담당구역을 나눠

동시에 독일을 압박할 계획을 세웠죠

9월 26일부터 29일 사이

전 전선에서 전면 공세가 펼쳐졌고

마침내 10월 8일

난공불락의 고지라 불리던 독일의 방어선

힌덴부르크선 마저 붕괴하였습니다.

(이후 공세를 계속해 11월 11일 휴전선까지 진격했습니다)

독일 최후의 보루였던

강력한 방어선이 붕괴하였다는 사실은

독일군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부전선의 진지는 뚫렸으며

군대의 사기는 붕괴하였고

정치인들은 협상을 원했습니다.

이제 휴전하는 길 말고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10월 17일 루덴도르프가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11월 5일 즉각 적인 휴전을 요청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쯤이면 독일의 상황은

안팎으로 궁지에 몰려있었습니다.

동맹국이었던 불가리아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차례차례 휴전협정을 맺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전 교섭을 진행하는 와중에

독일 내부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독일혁명은

10월 말 독일 해군 사령부가 내린

무리한 출항 명령이 그 발단이었는데요

해군 사령부는 마지막으로 독일 해군의 명예를 위해

영국 해군과 결전을 벌일 것을 지시했습니다.

전세가 이미 기울어져 버린 상황에서

명예를 위해 치르는 전투는

수병들에게 자살하라는 뜻과 같았습니다.

수병들은 출정을 거부했고

불복종을 제압하려는 상부에 저항해

무기고로 몰려가 무장한 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1월 3일

킬 항구에서 발생한 수병들의 폭동에

노동자와 병사들이 가담했고

그 파장은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해

수도 베를린까지 미쳤습니다.

이웃 나라 러시아 제국이 겪었던 위기가

독일 제국에도 일어난 것인데요.

혁명을 원하는 세력들은

군인과 선원 및

좌익 혁명 단체였고

이들은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급진적인 좌익 세력들이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었는데요.

이들은 러시아 혁명을 본보기 삼았고

독일에도 공산혁명이 성공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패전 위기에 놓인 독일제국은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한편 빌헬름 2세 황제는

혼란스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군부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이때까지도 군대로 국민을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져있었죠

황제가 물었습니다

"깃발 맹세는"

"모든 독일군에게 명령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으라고 한

연대 깃발에 대한 맹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독일의 사령관중 한 명이 어렵게 대답했습니다.

“오늘 깃발 맹세는 그저 하나의 낱말일 뿐입니다”

11월 9일

독일제국의 수상 막시밀리안 폰 바덴은

혁명으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와 황태자가 권좌를 포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빌헬름 황제는 기차를 타고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군주가 사라진 독일 제국은 몰락했습니다.

잠깐 공화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이때 선포된 공화국은 다음 해인 1919년 8월 11일

독일의 한 도시인 바이마르에서 절차를 거쳐

새로운 정부로 정식 출범하는데요.

정식 명칭은 독일국이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군주제였던 독일제국과는 달리

헌법을 토대로 한 의회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는

겉보기엔 무척 이상적이었지만

독일의 경우 정치적 지지기반이 약해

공화국 수립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많았습니다.

국가의 정통성과 애국심과 관련되어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았고

극좌와 극우세력 모두에게 도전을 받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훗날 나치독일이 등장하며 정권의 막이 내립니다. (유튜브 검열로 로고는 대체했습니다)

새 공화국 정부는 휴전 협상을 진행 중이던 대사들에게

기한 내에 휴전 협정에 서명할 것을 통보했습니다.

마침내 11월 11일 오전 5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4년 반에 걸친 1차 세계대전의 끝이었습니다.

참고로 휴전 협정이 체결된 장소가 무척 특이합니다.

도시의 궁전도 군 지휘소도 아닌

프랑스의 콩피에뉴 숲속에 있는 열차 객실이었죠.

이 열차는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프랑스 원수인 페르디낭 포슈의 개인 열차였습니다.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 프랑스는 열차를 수도 파리로 옮겨 전시했습니다.

그리고 22년 뒤

이 열차는 한 남자에 의해 다시 콩피에뉴 숲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바로 히틀러로

2차대전 당시 히틀러는

휴전조약을 체결한 열차를 보관하고 있던

프랑스 박물관 벽을 허물어

열차를 다시 콩피에뉴 산림으로 끌고 갔고

1918년 휴전 조약을 체결한 바로 그 자리에서

프랑스에 항복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휴전 조약을 맺은 뒤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1차대전의 책임과 배상 문제를 놓고

전승국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요.

실제로 강화회의의 내용을 결정한 것은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이었습니다.

참고로 전승국에 속한 나라 중에 이탈리아도 있었는데요.

이탈리아는 원래 동맹국의 일원이었지만

연합군 편에 참전하는 대가로

영토를 얻는 비밀 약속을 한 뒤

진영을 변경한 나라였습니다.

이탈리아는 1차대전에서

60만명의 전사자를 낼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자

강화회의에서 여러 이유를 들어

그 대가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전후 처리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 대표는

회의 중간에 퇴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는 1차대전을 겪은 뒤

전쟁 후유증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는데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대다수의 국민들 사이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

전승국들이 표면상으로 내세운 조약의 원칙은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했던

<14개조 평화원칙>이었습니다.

14개조 평화원칙은 무척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비밀 외교 같은 거 하면서

뒤에서 몰래 나눠 먹는 그런 약속하지 말자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국제협약 만들어서 공개적으로 해결하자.

이런 내용들이었죠

그리고 그 중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민족자결주의였는데요.

요약하자면

한나라의 운명은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식민지배를 당하고

억압당하던 약소민족들에 희망을 주는 발언이었습니다

평화 원칙은 표면적으로는 무척 이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적용되기에는

여러 국가의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중 이미 여러 나라와 전후의 영토 문제에 관해

많은 비밀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전승국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독일을 철저하게 응징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강화 조약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윌슨의 평화 원칙은 일부만이 적용되었고

식민지와 관련된 약소국의 독립문제는

사실상 승전국이 보유한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인데요.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에 10년 가까이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독립운동가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두고

독립을 위한 국제적인 지지를 받을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는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 활약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여한 승전국이었습니다.

승전국이 보유한 식민지의 독립 문제는

주목받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국제 정세였기에

조선의 독립문제는

일본이 2차 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1945년 8월 15일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앞서 설명했던

윌슨의 평화 원칙이 큰 틀이 되어

독일과의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이 결정되었는데요.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커다란 치욕을 안겨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독일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이 치욕스러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은

과거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뒤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빌헬름 1세의 대관식까지 열었던 곳이었습니다.

프랑스는 40년 전의 치욕을 갚기 위해

이곳을 서명 장소로 선택한 것이었죠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독일은 많은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참고로 지금 보고 계신 지도는

1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

여러 국가로 쪼개진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독립한 폴란드의 모습입니다

우선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인

알자스 로렌 지역이 프랑스에 반환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과거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 (보불전쟁)의 결과로

1871년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던 곳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철광석이 아주 많이 나는 알짜배기 땅입니다.

독일은 프랑스를 비롯해

벨기에 폴란드 등 여러 나라에 영토를 내줘야 했는데요

뿐만아니라

철강 자원과 석탄 등이 풍부한

자르지역에서 발생한 자원은

15년 동안 프랑스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라인란트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어

15년 동안 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장비와 병력도 극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징병제는 금지되었습니다.

잠수함과 공군도 금지되었으며

주된 무기생산또한 금지되었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독일이 지급해야 했던 전쟁 배상금이었습니다.

확정된 배상금액은

1320억 금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했는데요.

이는 민간인에 대한 보상과

군인연금까지 포함되어 책정된 금액입니다.

1320억 금 마르크는

독일 국민이 낸 세금을 한 푼도 안 쓰고

22년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참고로 독일의 전쟁배상금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시 부채와 연결되어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 정부나 미국은행에 많은 빚을 진 상태였는데요.

이런 전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한 것이었습니다.

연합국은 배상금 부과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베르사유 조약 제 231조 항을 내세웠습니다.

연합국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에 의해

강요된 전쟁의 결과로

국민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한 책임이

독일과 그 동맹국에 있음을 확인하고

독일은 이를 인정한다.

베르사유 조약 제 231조는

전쟁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독일에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책임은 정말 독일에만 있었던 걸까요?

지난 1차 세계 대전 영상 1화에서 5화까지 이 주제를 다뤘었는데요.

전쟁의 발발 과정을 살펴보면

1차대전을 단순히 한나라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침략전쟁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혀

선제공격의 신화에 쫓기고

수많은 잘못된 결정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발생한

끔찍한 결과.

그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물론 이 주제는 다양한 관점의 주장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베르사유 조약 231조를 그대로 원용하는 견해는

이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231조에 따른 과도한 전쟁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파탄시켰으며

전쟁의 책임국으로 낙인찍힌 상황은

독일 국민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남겼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인적 손실 및 물적 손실은 막대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만 명에 달했고

부상자 수는 그 두 배인 이천만 명에 이르렀으며

물질적 손실은 2000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두 번 다시 이런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세계 최초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으며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도되었습니다.

하지만 국제연맹의 시작은 독일과 소련은 배제된채

전승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규정에는 수많은 허점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국제연맹의을 주도했던 미국이

고립주의 노선을 택하며 연맹에 불참하자.

이상적인 국제기구의 창설 계획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분쟁 해결에 있어 한계를 지녔던 국제연맹은

결국 2차 세계 대전을 억제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결과

제국주의 시대에 부를 축적하며 세계를 지배하던 유럽은

많은 것을 잃었고 재정적으로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제국이 붕괴하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신생 국가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습니다.

세계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범람했고

유럽은 전쟁이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한편 유럽이 힘을 잃은 것과는 반대로

1차대전을 통해 획기적으로 성장한 나라도 있었는데요.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1차 대전을 통해 경제 대국은 물론 군사 대국으로 발전한 미국은

유럽을 대신해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한편 전쟁 이후 독일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전쟁에서 독일군은 잘 싸우고 있었고

어쩌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 등과 같은 반정부 세력들이 나라를 흔들어 후방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군인 들이 지원을 받지 못해 전쟁에서 패배했다 는 것입니다

이는 배신자들이 뒤에서 칼을 꽂았다는 주장으로

일명 배후 중상설로 불립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었죠.

독일은 전쟁을 더 지속할 여력도 없었으며

전쟁을 계속했다 한들

더욱 비참한 패배를 맞이했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패전의 혼란과 경제 침체에 허덕이던 독일 국민들은

냉정한 현실 대신 신화에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국민적 상처 잘 이용한 한 남자가

국가의 영광을 되찾자며 애국심을 강요하는데.

이와 같은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국민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독일에는

과거의 영광을 위해

독일을 재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세계는 또다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혼란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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