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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차 세계대전10

by 희황 2020. 4. 15.

1917년 니벨 공세가 실패한 이후 프랑스 병사들이 느낀 절망감은 심각했습니다.

지휘관의 실수와 잘못이 명백히 드러난 사건으로 인해

병사들 사이에선 더 이상 상관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죠.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전선으로 복귀해야할 시간에 사라져 버리거나

휴식을 취하러 가버리곤 했습니다.

병사들의 반란은 니벨공세 직후인 1917년 4월 중순에서 6월 초까지 가장 심각했는데,

이는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이 겪은 최악의 위기였습니다.

참고로 이때 일어난 병사들의 반란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폭동이 아닌 일종의 군사 파업이었습니다.

많은 장교들이 병사들의 규율 위반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항의에 이유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 이유는 전선에서 프랑스 병사들의 처우가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사작전이 지속되면서 병사들은 잠깐의 휴가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몇 개월씩 전선을 지켜야 했고 이때 배급받은 식량은 형편없는 것들로

그마저도 양이 부족해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공격을 하지 않는 일종의 파업을 하면서 병사들이 원한 건 오로지 존중받는 것이었습니다.

무의미한 소모전에서 총알받이 취급을 받는 일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것이죠.

반란이 전선 전체로 확대되며 사태는 심각해졌고

니벨의 후임으로 취임한 페탱은 위기를 해결해야했습니다.

페탱은 겉보기엔 무척 무뚝뚝해보이는 사령관이었고, 군대를 엄하게 다스리곤 했지만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데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특별휴가를 도입했는데, 최대한 많은 병사들이 휴가를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각 역마다 병사들을 위한 환영식이 이루어졌으며, 저렴한 가격의 군대 협동조합 매점도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장교들이 병사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도록 독려 되었다고 합니다.

페텡의 노력은 프랑스의 군기 회복에 실제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노력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로운 군사 전략을 실시할 때 프랑스 병사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페탱은 병사들을 무리하게 쏟아붓는 대규모 작전이 아닌

제한적인 공세를 추진했는데,

이런 공세가 다행히도 성공적으로 수행되면서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병사들의 전투 의지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죠.

병사들은 더 이상 불필요한 공격을 무리하게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프랑스 군대는 조금씩 질서를 찾아갔습니다.

1917년은 연합국에 무척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프랑스는 니벨 공세 실패 이후 병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폭동을

가까스로 진압해야 했고

영국은 프랑스를 대신해 서부전선의 공세를 주도했지만 수많은 병력을 잃었습니다.

영국군이 추진한 공세는 1917년 여름에 실시되어 11월까지 이어졌는데요

파스샹달 전투 또는 패션데일 전투라고 불립니다.

이 전투는 1916년에 일어났던 베르됭 전투, 솜 전투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병력이 소모된 최악의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1915년 비밀조약을 맺으며 연합군에 가담한 이탈리아 또한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17년 10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이탈리아의 카포레토 전선을 합동 공격해

순식간에 90킬로미터 이상을 밀리게 된 것이었죠.

벼랑 끝에 몰린 이탈리아를 돕기위해 연합군은 지원부대를 파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선 2월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제국이 몰락했습니다.

이후 러시아엔 볼셰비키가 중심이 된 소비에트 러시아가 들어섰는데요.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 강화 협상을 맺고 곧 전쟁에서 이탈할 예정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소련이 만들어지는 진짜 과정! 러시아혁명★ 영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미국은 뭘 하고 있던 걸까요? 1917년 4월 6일에 독일에 선전포고했었는데 말이죠.

놀랍게도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습니다.

참전 결정을 내릴 당시 미국 육군 병력은 10만 7,641명으로

병력 규모는 세계에서 17번째로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미국은 전국적인 징병을 해야 했는데

징병 과정 또한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력을 모으는 시간도 필요했고, 징집된 병사들이 서부전선에 도착하는 시간,

그리고 도착한 병사들이 전장에 적응하기 위해 기본적인 훈련을 받는 시간도 필요했죠

1차대전을 위해 급하게 징집된 미군 병사들은 전투 숙련도가 떨어졌고

처음 경험하는 전장의 상황이나 무기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습니다.

미군의 병력 수송은 여러 문제로 무척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1917년 12월 1일 당시 서부전선에 파병된 미군 병력은 겨우 13만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심각한 병력 부족을 겪고 있었는데요

독일이 춘계공세를 위해 동부전선에 있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옮기자

그 병력수가 연합군을 뛰어넘을 정도였습니다

미군의 병력 보급 상황은 1918년 3월 이후부터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미국이 보여준 병력 동원 능력은 엄청났습니다.

1918년 3월이면 31만 8천 명이 프랑스에 도착했고

1918년 여름에는 매일 1만 명의 병력을 프랑스 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총 400만 병력을 동원해 원정군을 계획했고

전쟁이 끝나는 시기인 1918년 11월에는

무려 약 200만 명의 미군 원정군이 서부전선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같은 시기 독일은 무리한 공세를 추진한 결과로 병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습니다.

1918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1918년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1918년 1월

전쟁이 오랜 시간 이어지자

프랑스 내부 상황도 함께 열악해졌습니다.

국민은 국가에서 보급하는 빵을 배급받았는데

전쟁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품질이 나빠져

맛이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설탕은 쉽게 먹을 수 없는 재료였으며

우유와 버터, 계란 역시 값비싼 귀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이 겪는 식량 부족 상황은

독일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가 식량 배급을 조절하며

허리띠를 조이기 시작한 시기는

1916년 중반쯤이었는데

같은 시기 독일의 식량 상황은

이미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1918년의 독일 시민들은

끼니를 때울만한 것이 거의 없었고,

주식은 거의 순무로 대체되었습니다.

3년 동안 국경이 봉쇄되면서

식량부족이 극한에 달한 것이 그 원인이었는데.

그동안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가정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라에서 가끔 빵이 배급되기도 했지만

밀가루 대신 나무 톱밥을 넣어 만들었기 때문에

끔찍한 맛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은 식량뿐만 아니라

석탄, 석유등 각종 연료와 유지 보수를 위한

다양한 자재들이 부족했습니다.

옷 또한 쉽게 구할 수 없었으며

구두용 가죽을 구할 수 없어

나무로 된 나막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동안 독일은 식량난과 각종 물자난을 발생시킨 원인인 해상봉쇄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독일은 해결법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었는데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란

독일 잠수함 U보트를 활용해

연합군 선박을 가리지 않고 침몰시키는

공격작전입니다.

그런데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 선박이 침몰하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피해를 입은 중립국의 강한 비난이 이어져

작전은 잠정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지속될 전쟁에서

해상 봉쇄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난관이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1917년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습니다.

매달 60만 톤의 선박을 종류를 가리지 않고 격침해

6개월 후에는 영국을 굴복시킬 계획이었죠

군부 장성인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

당시 독일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초기에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는 듯했습니다.

수십만 톤의 연합국 선박을 격침하며 영국을 위협하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나중에는 연합국도 이에 맞춰 대응책을 마련했고

점차 격침하는 선박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연합국이 전쟁을 중단할 만큼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미국의 개입만을 불러일으킨 실패한 작전이었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참전하게 되었는지는 치머만 전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세계대전 8화 영상★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917년이 끝났을 때 독일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군사 전략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조금 뒤면 대서양을 건너 서부전선에 합류할 수백만 명의 미군을 상대해야 했죠.

몇 가지 희망이 있다면

미국이 서부전선에 본격적으로 병력을 공급하기 전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으며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이탈함으로써 여유 병력이 생겼다는것입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대치하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켰고

모든 힘을 동원한 마지막 한타를 열어보기로 결심합니다.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

전시 상황에서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지녔던 두 군부 장성이

공세를 주도했습니다.

1918년 3월 21일에 실시된 이 공세는

춘계공세, 또는 루덴도르프 공세라고 불리는데요

독일의 최후의 공세였습니다.

춘계 공세 당시 연합국과

독일의 물자와 병력을 비교해보면

서부전선에 주둔한 독일군은 192개 사단

연합군은 178개 사단이었고

연합국의 항공기는 4,500대

포는 1만8,500문, 전차는 800대였습니다.

독일은 항공기 3,670대

포 1만4,000문, 전차는 10대를 보유했습니다.

독일은 병력수는 앞섰지만

전차 개수는 충격적일 정도로 적었습니다.

공업상의 지체로

전차 개발에 뒤처진 것이 그 이유였는데요.

1차대전 동안 독일이 생산한 전체 전차 생산량은

21대에 불과했습니다.

독일은 전차뿐만 아니라

서부전선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동성 있는 무기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장갑차 또한 전혀 없었고

서부전선에 배치된 기병대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생산된 마차나 기계화된 수송 수단들도

수년간에 걸친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품질이 조악해져

대부분 공격작전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전차 부족을 전술의 발전으로 보완하려 했는데

이때 적극적으로 활용된 전술이 바로 후티어 전술입니다

후티어 전술은 독일의 후티어 장군이 개발한 전술인데요.

쉽게 말해 적진으로 침투하는 돌격 전술입니다.

이 전술의 특징은 적진에 짧고 강력한 포격을 가한뒤 곧바로 정예병력을 투입하는 것인데

이때 투입된 병력은 정예부대로 선출한 돌격대였습니다.

참고를 돌격대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스톰트루퍼입니다.

돌격대원들은 각 부대에서 차출된 젊고 강한 병사였으며

경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화염방사기 등

강력한 화력 무기로 온몸을 무장했습니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적의 전선중 가장 취약한 지점을 공략해

신속하게 적의 종심으로 전진한 뒤

주요 거점들을 파괴하고,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미처 처리하지 못한 적의 방어선과

저항이 강한 지점들은

뒤따르던 일반부대에 맡겨졌습니다.

돌격대가 최대한 적의 깊숙이 침투해

돌파구를 확대하면

뒤따라온 후발 부대 들과 함께

적의 방어선을 함락시키는 것이 전술의 목표였습니다.

이 전술은 과거 카포레토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그 효과가 입증된 전술이었고

실제로 서부 전선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냈습니다

독일이 야심 차게 계획한 춘계공세는 서부전선에서 진행되었는데요.

프랑스 전역에 1918년 3월부터 7월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습니다.

주력 공세는 3월 21일 첫 번째로 실시된 미카엘 작전이었고

나머지 공세는 미카엘 작전을 보조하는 역할로 계획된 공세였습니다.

미카엘 작전의 목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닿아있는 곳을 공략해

영국군을 북서쪽으로 몰아 해안가 방향으로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영국을 섬멸시키고 나면 프랑스를 처리하는 것도 쉬울 것이라는 계산이었죠.

3월 21일 오전 4시 40분 연합군 진지에 독일의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춘계공세의 첫 번째 작전인 미카엘 작전이었습니다.

포격은 6만 5천 문의 야포와 3,532문의 박격포를 동원해 이루어졌는데

이때 각종 최루탄과 독가스를 함께 투하해 적진을 마비시켰습니다

기습을 당한 영국의 진지는 각종 가스와 포탄으로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포격이 끝나자 정신이 혼미해진 영국군 사이로 독일 돌격대가 신속히 침투했습니다.

전장을 짙게 가린 안개 덕에 독일군 돌격대의 침투 전술은 거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영국군은 돌격대를 향한 포격이나

기관총 사격을 제대로 가할 수 없었고

순식간에 독일군에 압도당해 방어선이 빠르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방어선이 함락되며

영국군 사단과 프랑스군 사단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은 그대로 진군해 전선에 커다란 돌출부를 형성했습니다.

과거 서부전선에서 고작 몇 마일의 땅을 빼앗고 탈환하기를 반복했던 지지부진한 전투를 떠올린다면

이번 공세는 지난 전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독일은 공세의 성공을 자축하며 축배를 들었습니다. 3월 23일 학교에는 승리를 기념하는 휴교령을 내렸고

힌덴부르크에게는 대십자 철십자 성장을 수여 했습니다.

이 훈장은 독일 역사상 단 두 사람만이 받은 훈장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1815년에 받은 게 처음이었고

그다음이 바로 1918년의 힌덴부르크였습니다.

참고로 이 훈장을 받을뻔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는 바로 히틀러인데요

나치 독일 시절 부수상이었던 헤르만 괴링이

2차 대전에 승리하고 나면

아돌프 히틀러에게 바칠 목적으로 제작을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패망한 뒤 훈장은 주인을 잃게 되었고 이후 미군의 노획품이 되었습니다.

독일은 공세의 성공을 축하하며 기쁨을 누렸지만, 그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습니다.

초기의 성과는 눈부셨지만 더 이상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정말로 달성해야 할 목표는 실패 했던 것이었죠

기습공세를 당해 후퇴했던 영국군은 잠시 사기가 붕괴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빠르게 회복했고 전선을 끝까지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원래 목표대로라면 영국군을 고립시키는 데 힘 써야 했지만

쉽고 빠른 성과를 얻은 돌출부를 활용해 이어서 돌파한다는 새로운 전략에 매료되어버렸습니다.

독일 참모본부 구성원들은 훌륭한 능력과 지성, 근성을 지닌 걸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너무 단기적인 사안에 주의가 분산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독일은 기존의 계획을 수정했고 북서쪽 방향에 단일 공격을 쏟아붓는 대신

서쪽과 남서쪽에도 동시에 진격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병력은 세 갈래로 나뉘어 사방으로 분산되었고 어느 곳에서도 결정타를 날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장엔 또다시 끝을 알 수 없는 소모전이 이어졌고 독일군은 전선에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참고로 영국군이 후방 지역에서 사용했던 각종 생활용품 또한

독일군의 진격을 방해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그동안 끔찍할 정도로 궁핍한 병영 생활을 이어왔는데요

오랜 시간 해상봉쇄를 겪으며 각종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린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1918년 3월의 병사들은 무척이나 지쳐있었고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거의 탈진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영국군대가 후퇴하면서 남겨놓은 각종 생필품은

독일군이 평소 얻을 수 없는 값비싼 사치품이나 마찬가지였죠

약탈의 유혹에 빠진 병사들의 본 독일 대령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사단이 완전히 걸신들린 듯 게걸스럽게 음식과 술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공격을 강행하는 데 실패했다

참고로 술과 약탈에 탐닉하는 군대의 모습은 다른 국가들도 비슷하게 겪었던 문제로

독일 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루덴도르프는 1주일에 세 번이나 공격계획을 수정하며 몇 차례나 더 공세를 시도했지만

이런 노력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돌격대와 보급대 사이에 간격이 벌어져 보급이 끊겼고 힘겹고 무의미한 소모전이 반복됐습니다.

독일은 결국 작전 개시 16일 만에 공세를 중단했습니다.

독일은 영국을 완전히 고립시키지도 못했고,

파고든 전선에서 좀 더 돌파해 주요 거점을 점령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번 공세는 아무런 전략도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공세였습니다.

이번 공세로 독일군은 25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연합군의 경우 영국군 17만 8천 명, 프랑스 7만 7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수치로만 따지면 독일군과 연합군의 병력 손실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이때 잃은 병력의 대다수가

독일의 정예병인 돌격대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돌격대원들은 예비병력으로 쉽게 보충할 수 없는 특수 병력이었고

독일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주력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독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새로운 작전을 개시했고 두 번째 공세는 4월 9일 시작되었습니다.

작전명은 게오르게테, 공세의 목적은 영국군을 북서쪽으로 몰아

해안에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번에도 전선을 확장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공세처럼 성과는 거기까지였고 또다시 소모전이 이어졌습니다.

영국을 해안가로 고립시킨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공세는 4월 11일 중단되었습니다.

독일의 2차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던 시기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는 붉은 남작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독일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입니다.

에이스는 전투기 조종사 중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조종사에게 붙는 호칭인데요

일반적으로 적기를 5기 이상 격추시켰을때 에이스 칭호를 받게 됩니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1차대전에서 총 80대의 전투기를 격추했습니다.

이런 수치는 1차 대전의 에이스들 중 가장 높은 수치로

그는 연합국과 동맹국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전설의 파일럿이었습니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자신의 전투기인 포커 삼엽기를 붉게 칠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를 상징하는 붉은 전투기는 게임과 만화 등 다양한 요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붉은 돼지, 그리고 엘오엘 게임의 코르키 스킨이 있습니다.

건담의 붉은 혜성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캐릭터도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네요.

만프레트폰 리히트호펜은 1918년 4월 21일 마지막 비행을 떠났고

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25살이었습니다.

참고로 1차대전 때만 해도 항공술이 발전하고 있는 단계였고

그 역할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공중전의 승패가 전투 전체의 승패를 결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망은 독일에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이후부터 독일의 전운도 함께 기울기 시작했죠.

이때쯤 독일은 주력 공세에서 연달아 실패를 반복했고.

무리한 공세로 인해 38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영국군은 거의 24만 명 프랑스는 대략 9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공세의 주도권이 독일에 있었습니다.

서부전선에 위치한 사단의 수가 독일이 앞섰기 때문이었죠.

독일은 그동안 엄청난 병력을 잃었음에도

새로운 공세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프랑스군이 밀집되어있는 전선으로 시야를 돌렸고

세 번째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세 번째 공세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공세 첫날에만 8개의 영국군 및 프랑스 사단이 사실상 전멸했던것이죠.

독일은 프랑스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

단 나흘 만에 마른강 전선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마른강 돌출부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는 60마일도 채 남지 않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에 큰 위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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