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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엘리자베스 1세

by 희황 2020. 4. 15.

신대륙의 발견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린 16세기의 유럽

이 시기 남미의 식민지를 점령해 금과 은을 벌어들이며

큰 수입을 올리고 있는 나라는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세계의 강국으로 거듭났는데요.

반면 오늘의 이야기의 중심 무대인 잉글랜드 왕국은

당시에는 아직 국력이 약한 작은 나라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 1588년 8월 8일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이 바다에서 해상의 패권을 두고

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잉글랜드 왕국은 놀랍게도

왕실의 함대를 단 한 대도 잃지 않은 채로

스페인 함대를 모두 물리치는

엄청난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물론 당시에 스페인인이 워낙 강국이었기 때문에

한 번의 패배로 해양 강국의 패권을

내려놓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두 나라 사이에선

여러 차례 해상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첫 해상전에서 얻은 승리를 통해

유럽 대륙에서

해양강국으로 부상하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해로를 확장해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게 된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죠.

당시 잉글랜드의 군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었는데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 드레이크를 등용해 해군을 육성하고

해상무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영국의 해상 발전에 힘을 쏟은 여왕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지금까지도 영국 역사의 황금기를 이끈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여왕에 즉위하기까지

그리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직후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대립이 극심해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임 기간 내내

그녀를 향한 수많은 음모가 쏟아졌으며,

그녀의 혈통을 문제 삼으며

왕위를 위협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외부 세력이 개입된 권모술수와

끊이지 않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녀는 잉글랜드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과연 어떻게 여왕이 되었고,

또 어떻게 잉글랜드를 이끌었던 걸까요?

오늘 이야기의 주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입니다.

여왕이 아직 태어나기 전인

1517년으로 가보겠습니다.

독일의 한 지방에서

마르틴 루터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교회에 종이 한 장을 붙였습니다.

종이 안에는

로마 가톨릭의 비리를 일일이 기록한

95개 반박문이 적혀있었는데

면벌부를 남발하고, 성직을 매매하는 등

당시 온갖 비리의 온상이었던

로마 가톨릭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당시 서방 교회는

교회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되어있었고

이는 곧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성격을 지녔는데요.

비리가 만연하던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관행과

교의들에 저항한 세력들은

새로운 기독교 집단을 원했습니다.

참고로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관행에 저항한 것이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교회의 다양성이 인정되어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새로운 기독교 집단이 창출되었는데.

이를 로마가톨릭에 저항했다는 의미의

프로테스탄트

또는 개신교라고 부릅니다.

개신교 기준으로 본다면

개신교는 신교 로마 가톨릭은 구교 가 됩니다

교회의 다양성이 인정된 이 사건을

종교개혁 이라고 하는데요

종교개혁으로 교황에 집중되었던 교회 질서에서

교회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시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을 철저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가톨릭을 중요시하던 잉글랜드에도

종교개혁이 발생했는데요.

표면적인 원인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였지만

배후에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요인들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헨리 8세는

형 아서 튜더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했는데요.

이때 자신의 형수였던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수와의 결혼이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결혼은 외교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스페인 출신인 형수 캐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연결고리를

이어가려 했던 것이었죠.

문제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서

메리 1세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결국 쌓아온 권력이

딸의 사위에게 넘어갈 것이 분명했기에

헨리 8세는 아들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에 신께서 벌을 내려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고

새로운 여자와 재혼하려 했는데요

그러려면 우선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 했습니다.

헨리 8세는 교황을 찾아갔고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서는

이혼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교황은

스페인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관계였기 때문에

이를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1529년 헨리 8세는 이혼을 하기 위해

로마가톨릭에서 나와

새로운 기독교 집단인 영국국교회를 선언했습니다.

영국국교회는 잉글랜드 성공회라고도 부릅니다.

이 사건으로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는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종교 개혁이 발생했지만

전례 의식이나 생활방식

윤리적 가치 등 모든 것이 그대로였기 때문에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종교 개혁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세금이 징수되어 바티칸으로 가는 단계가 없어지고

그 단계가 헨리 8세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고위 성직자들은 이것에 대해 크게 반발했고

이때 많은 숙청을 당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뿐만이 아닌

상당히 정치적인 이유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한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한 뒤

곧바로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재혼했는데요.

이번에도 또 딸을 낳았습니다.

1533년 9월 7일 태어난 이 아이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안타깝게도 앤 불린은 이후에도 아들을 낳지 못했고

유산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을 시켜버렸습니다.

어머니가 사형당한 이후

엘리자베스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다고 합니다.

공주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왕위계승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그녀는 궁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특히 이복언니인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했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다고 합니다.

헨리 8세는 이후 세 번째 부인을 맞이했는데요.

이때 그토록 원하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얻었습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은 뒤

9살의 어린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이었는데요.

에드워드 6세는 왕이 된 지 6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왕위는 순서상 메리 1세가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이자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의 딸이었던 메리 1세는

가톨릭을 지지했는데요.

가톨릭을 잉글랜드의 유일한 신앙으로 굳히고자 했습니다.

메리는 통치 기간 동안 신교도들을 탄압했는데

개신교 신자를 화형대에서 불태워 죽이는 등

수많은 숙청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보통 마녀사냥이라고 하면

중세를 떠올리기 쉬운데요.

실제로 마녀사냥은

종교탄압이 극심했던

근세에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메리는 종교탄압을 하며 학살을 저지른 탓에

블러디 메리, 피의 메리라는 오명을 얻었습니다.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엘리자베스의 삶은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메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은 장본인인

엘리자베스를 무척 미워했고,

그녀에게 신교를 신봉한다는 죄를 비롯해

온갖 죄명을 갖다 붙인 채 유배를 보냈으며 이후에는 런던탑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후에는 런던탑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참고로 영국의 런던탑은

과거 신분이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수감되는

일종의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에서 벗어난 엘리자베스는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해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독서에 빠져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합니다.

1558년 11월 17일

메리 1세가 45살에 죽어버리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고

헨리 8세의 남아있는 유일한 핏줄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여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버지 헨리8세처럼

영국 국교회를 지지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남겨진 영국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인구는 고작 350만 명에 불과했고

국고는 바닥이 나 있었으며, 국민들은 가난에 찌들어갔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신교도와 구교도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이어졌고,

외부에서는 스페인이 해상을 장악해

잉글랜드는 해상무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죠.

외교무대에서 또한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패권 다툼에 끼어

눈치를 보는 신세였습니다.

의회에서는 영국의 국력을 위해

여왕이 결혼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권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평생토록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의회에서 거듭 여왕의 결혼을 재촉하자

엘리자베스는 반지를 낀 손을 들어 보이며

모든 대신 및 의원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영국’이라는 남편을 섬기고 있소”

엘리자베스 1세는

실제로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추측이 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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