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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러시아혁명

by 희황 2020. 4. 15.

1917년

차르인 니콜라이 2세가 다스리고 있는 러시아 제국은

무척이나 위태로웠습니다.

1차대전을 치르며 고전을 면치 못한 탓에

나라는 전쟁과 가난으로 황폐화 되었죠.

이 시기 러시아 병사들은

굶주린 상태로 보급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전선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1차대전 때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나쁘지 않은 편이었는데

차라리 적군의 포로가 되어

배급되는 죽을 먹는 게 나을 정도여서

자진해서 포로가 되는 군인들이 속출했습니다.

후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대중의 삶 또한 무척 어려웠는데

신발이나 옷 기름을 포함해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힘든 시기

러시아에 엄청난 혹한과 눈보라가 엄습했습니다.

이때 철도의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어

식량과 연료가 수도로 배달되는데 지장이 생겼고

도시의 공급상황은 거의 붕괴 직전까지 다다릅니다.

창고에 남아있는 식량이 겨우 며칠 분의 곡물이 전부였고

식량 배급을 위해 줄을 선 시민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더이상 배급할 식량이 없다' 였습니다.

1917년 3월 8일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차르의 무능함에 분개한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2월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참고로

당시 사용했던 러시아 달력인 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2월 23일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2월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시위에는 무기 공장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과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행진이 더해졌고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는 곧 시위대의 물결로 덮였습니다.

다음날 도시에는 군인과 경찰이 도처에 배치되었고

시위대를 향한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선 12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죠?

1905년 일어난 일명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가혹한 탄압으로 진압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위의 양상은 조금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수도 수비대의 병사들이 시위 대중에게 추가 발포하라는 장교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시위에 합류한 것이었죠

이후 농민과 노동자 군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인물로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는 데

이를 소비에트라고 부릅니다.

차르 정부는 북부 전선이나 지방 주둔지로부터

더 많은 부대를 차출해 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도로 복귀한 병사들이 폭동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죠

정부는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고

사실상 수도에서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재정 러시아의 의회였던 두마의 의원들은

황제에게 나라를 위해 퇴위하고

모든 권한을 넘기라고 촉구했습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퇴위 선언을 했습니다.

황제가 통치권을 장악한 전제군주제의 종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지난날 니콜라이 2세가 저지른 수많은 실책이 쌓여

결과로 돌아온 것과 같았습니다.

그동안 시대의 흐름이 요구하는 개혁이나 요구를 계속해서 무시해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너무나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이후 황실 일가는

수도에서 24km 정도 떨어져 있는 별궁에서

가택 연금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신변의 위협을 피해 시베리아의 한 도시로 이송되었습니다.

시베리아로 이송된 로마노프 일가의 일상은

이전보다는 제한되었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가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자

로마노프 일가의 앞날에도 시련이 불어 닥쳤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원수가 사라진 자리는 임시정부가 대신했습니다.

임시정부를 구성한 건

반 황제 성향을 지닌 과거 의회 정치인들이었는데

주로 대지주, 귀족 자본가 출신의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한 소비에트 세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갖는

이중 권력 체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2월 혁명으로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가

전쟁과 개혁이라는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지난 정권이 그랬듯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1차 대전을 중단한 것도 아니었고

기존 체제에서 눈에 띌만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죠.

혁명을 일으켰지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고

민중들의 지지와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위태로운 러시아의 상황

독일의 총 참모부는 기회를 활용해

러시아의 정국을 완전히 흔들어 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방법은 사회주의 사상가인 레닌을 투입해

러시아에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었죠

레닌은 과거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하다

정치 탄압을 받았고

당시에는 스위스에 망명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레닌을 지지하는 세력은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주의 정파인

볼셰비키였습니다

독일군 총 사령부는 레닌을 일명 봉인 열차에 태워

러시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 작전은 독일 군부 내에서도

극소수 사람들만 아는 비밀작전이었습니다

레닌은 그동안 선전문을 통해 수없이 독일을 비난해 왔기 때문에

반대 세력인 독일과 협력한다는 사실을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레닌은

외부의 지원 없이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독일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레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혁명을 이뤄내는 것이었죠

레닌이 탄 봉인 열차는

스위스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쭉 올라가 독일을 지났고

스웨덴과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 국경으로 넘어갔습니다

레닌이 향하는 곳은

2월 혁명이 발생한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였습니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고국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은

임시정부를 무너뜨려야 하며 계급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내전을 일으켜

권력을 임시정부에서 노동자 세력으로 이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죠

레닌은 빵, 평화, 땅을 약속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 했습니다

이후 레닌은 볼세비키 함께 봉기를 일으켰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임시정부는 정권을 위협하는 레닌에 수배령을 내렸고

레닌은 수염의 깎고 가발을 뒤집어 쓴 채

핀란드로 도피 해야 했습니다

한편 임시정부는 케렌스키가 새롭게 취임했는데

그는 자본가 세력과 소비에트 세력 모두에게 신임을 얻은

온건파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임시정부의 입지는 불안해져만 갔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상대로 한 일련의 공세에 실패하고

이후 정권에 도전하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이를 간신히 진압하는 등

입지가 추락하는 일련의 사태를 겪은 것이었죠

이 결과 임시정부의 군대 지휘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정치체제는 신뢰를 잃어

영향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수도권 민중은 임시정부의 무능함에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레닌은

볼셰비키의 승리를 확신하고

다시 한번 봉기를 결심했습니다

1917년 11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 (당시 러시아 달력인 율리우스력 기준 10월 24일과 25일)

볼셰비키 세력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페트로그라드를 급습했습니다

이때 일어난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또는 10월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계획을 수립한 건 레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실행에 옮긴 건

볼셰비키의 일원이었던 트로츠키였습니다

재밌는 사실 중 하나는

혁명이 발생한 11월 7일이

바로 트로츠키의 38세 생일이었다는 점입니다

혁명군은 러시아의 중앙 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을 장악했고

이튿날 새벽 2시에

러시아 공화국 정부 청사로 쓰고 있던 겨울 궁전을 점령하며

혁명은 완료되었습니다

이틀 사이에 빠르게 완료된 군사작전으로

임시 정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권력을 내주었으며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러시아 공화국은 무너졌습니다

10월 혁명의 성공으로 러시아의 권력은 레닌이 중심이 된 볼셰비키로 넘어갔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체제에서 권력의 중심을 목표로 한 대상은

노동자와 농민 병사로 구성된 소비에트였습니다

혁명 이후 수립된 볼셰비키 정권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경제 파탄은 말할 것도 없고 피폐한 군대는 군대는 전투를 계속할 사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세력의 영향력은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었고

국내의 불안은 극심했습니다

따라서 볼셰비키 정권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 중 하나가

전쟁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독일에 평화 교섭을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대가로 요구하는 것들이 엄청났습니다

독일이 전쟁 하는 동안 점령한 모든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던 것이었죠

레닌은 독일과 협상하지 않을 경우

볼셰비키 정권이 유지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독일이 제안한 평화 조약을 수락하기로 합니다

레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혁명을 지키는 일이었죠

볼셰비키 정권은 1918년 3월 3일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은 러시아의 서부 일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레닌을 러시아로 투입시킨 독일의 전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1918년 11월 11일

누군가의 패망으로 종전이 성사되면서

이때 맺은 평화조약도 폐기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한 뒤

독일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 시켜

새로운 공세에 집중했습니다

1918년 3월 21에 시작한 이 공세의 명칭은

루덴도르프 작전 또는 춘계 공세라고 불렸는데

독일이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최종 공세였습니다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1차 대전에서 이탈한 러시아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러시아의 미래를 두고

내부에서 여러 당파 간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규모가 큰 대표적인 교전단체는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 정부군인 적군과

혁명 세력에 반대하는 백군이었는데

대표적인 단체의 이름을 따

적백내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 혁명군이었던 백군은

황제의 부활을 꿈꾸던 왕당파 군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백군이 왕당파는 아니었습니다

백군에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지주 자본가 농민 등 다양한 세력이 있었고

볼셰비키가 집권한 이후 강제 해산된 정당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군주제 지지자들이 황제의 가족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볼셰비키는 차르 일가가 반혁명 군에 구출되어

반대 세력을 결집할 것을 우려해

시베리아에 생활하고 있던 차르 일가를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동시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르 일가는 198년 7월 17일

한밤중에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니콜라이 황제와 알렉산드라 황후

4명의 딸과 막내아들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수행한 측근들까지 모조리 살해당했는데

볼셰비키들은 니콜라이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음을 알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죽음만을 공표하고

언론에서는 처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무고한 아이들까지 학살한 것을 인정하면

여론에 막대한 악재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이후 8년간 볼셰비키 지도부는

온갖 역정보를 유포하며 진실을 은폐했고

의도적으로 사건의 의혹을 확산시켰습니다

이후 돌았던 소문 중 하나가

막내딸인 아나스타샤가 탈출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황실 일부 인사들의 매장지를 밝혀내지 못한 점이

이런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죠

이 이야기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법적 재산을 탐낸 여러 인물이

자신을 아나스타샤로 지칭하며 나서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발견하지 못했던 러시아 황실 일가족의 시체가 추가로 발견되면서

아나스타샤의 죽음은 확증되었습니다

러시아 내전 기간에는

민간인을 포함해 1차 대전 때보다

더 많은 러시아인이 사망했습니다

적군 120만 명 백군 150만 명이 사망한 것이었죠

러시아 내전에 승리한 세력은

혁명군인 볼셰비키였습니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축이 되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습니다

소련의 탄생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단순히 권력 쟁탈을 위한 쿠데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민중의 간절한 소망이 뒷받침되어

기존의 부조리한 권력 체제가 무너지고

사회체제에 전반적인 개혁과 변화가 시도되었기 때문이죠

소련은 바로

이런 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국가였고

앞으로 실현할 새로운 이상향을 펼쳐 보일 실험대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준비가 끝나

하나씩 이룩해 나가야 할 시점에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은 암살 시도를 당한 뒤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건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스탈린이었습니다

이후 공산주의 이념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입맛에 맞게 왜곡되고 변질되었으며

극소수 정치가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직된 정치구조로 이어졌습니다

억압받는 대중을 해방한다는 가치를 내세웠던 혁명의 결과가

인간을 총체적으로 억압하는 구조가 된 것이었죠

혁명의 주요지지 기반이었던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으로 매수되어

권력에 대한 견제 기능을 담당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관료독재 체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마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혁명 과정을 살펴보면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 사이에서

정치 권력의 주도권을 두고

끊임없는 권력 경쟁을 벌였으며

스탈린 시절 공포정치의 기반이 된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의전신인 체카(ЧК)는

10월 혁명 직후인 1917년 12월

레닌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이후 소련의 적극 적인 주도로

전 세계에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수많은 나라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그랬듯

진정한 공산주의의 가치를 실현한 나라는

전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소련은 69년 동안 존 속했고

1991년 12월 26일 붕괴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지닌 기본적인 지향점은

인류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궁핍한 국민의 상황과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발판삼아 혁명에 성공한 이후에는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

러시아 혁명이 지닌 치명적인 한계로 지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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